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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의 대통령 선거

 

미국 대통령 선거가 불경기 속에서 그 막을 올렸다. 실업자 1,300만 명과 25%라는 실업률은 현직 대통령 허버트 후버에게 큰 압박이었다. 다른 민주당 후보와 경쟁하는 프랭클린 루스밸트는 1928년 이후의 경제 정책에 맹공을 퍼부으며, 후버 대통령과 월가 은행가들의 세력이 결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후버 대통령은 이에 침묵으로 일관했는데, 자신의 비망록에 진심을 털어 놓았다.

루스벨트가 1929년의 투기 열풍에 책임을 지라는 성명을 냈을 때 나는 어떻게 반박할지 고심했다. 연방준비은행이 1925~1928년 유럽 세력의 영향 아래 고의로 인플레이션을 조장한 사실을 폭로해야 하는지 말이다. 당시 나는 이 정책에 반대하는 쪽이었다.

후버 대통령이 억울한 심정을 토오한 것도 이해가 간다. 그는 대통령이라는 귀한 몸이지만 경제 정책과 화폐 정책에는 별로 영향력이 없었다. 정부에 화폐 발행권이 없었으므로 민간이 보유한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어떤 정책 이라도 탁상공론에 그치고 말았다.

후버 대통령이 월가로부터 외면당한 이유는 독일 배상 문제에서 은행가들의 방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9년 모건이 계획한 '영플랜'은 독일의 채무 부담 가중을 대가로 하는 것이었다. 월가에서 독일 채권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독일에 전쟁 배상금을 모집해주고 자신들이 채권 발행을 맡는 과정에서 큰돈을 챙기자는 의도였다.

1931년 5월, 이 계획이 실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로스차일드은행과 잉글랜드은행의 구제행동으로는 위긱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 모건 등 월가 은행재벌들은 이제 막 출범한 영플랜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모건 사의 라몬트 사장은 후버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고, 미국 정부가 독일 정부의 전쟁 채무 상환을 잠시 중지시키고 독일 금융위기가 잠잠해지면 다시 상환을 재개하도록 요구했다. 라몬트는 만일 유럽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면 미국의 경제위기도 더 심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후버 대통령은 프랑스 정부에 독일 전쟁 배상금 관련의 문제를 처리할 때는 먼저 프랑스 정부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노라는 약속을 했다. 정치가로서 자신의 약속을 뒤집을 수 없었던 후버는 라몬트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일 이라면 고려를 해보겠소. 그러나 정치적 각도에서 고려할 때 이번 일은 현실에 맞지 않소. 선생은 뉴욕에 있기에 한 나라의 입장에서 정부 간 채무에 대한 감정이 어떤 건지 이해하지 못할 거요."

라몬트가 대답했다. " 며칠 동안 대통령도 들으셨곘지만, 1932년의 공화당대회에서 대통령의 후계자를 세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계획대로만 해준다면 그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라몬트가 당근 작전으로 나갔다. 일이 잘될 경우 모든 공을 완전히 대통령에게 돌리겠닺는 말이었다.

1932년 7월, 라몬트는 백안관으로 사람을 보내 독일의 전쟁 배상금 문제 연기를 다시 고려하라고 독촉했다. 이번에는 후버도 참지 못하고 분노를 토해냈다. "라몬트는 일을 망치고 있네. 국민이 반대하는 이런 계획(독일,영국,프랑스가 미국에 대한 채무를 사면해주거나 연기하는 일)은 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거라네. 라몬트는 은행가들에 대한 전국적인 분노의 정서를 알지 못하는군. 그들(은행가)은 우리(정치가)도 공범이 되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네. 어쩌면 은행가들이 이미 독일인과 보상 문제에 협의했는지도 모르지. 그것도 가장 치사한 방식으로 말일세." 결국 후버는 월가의 요구를 거절했고 프랑스는 채무를 연체하는 상황이 되었다.

월가 금융재벌들의 심기가 더 불편한 이유은 후버 대통령이 증권시장 조작 행위를 조사하고 일련의 금융 스캔들을 캐기 시작했기 떄문이다. 여기에 유례없는 실업 사태와 불경기, 증시 폭락으로 큰 손해를 본 국민까지 더해 월가 금융가에 대한 강렬한 분노를 터뜨렸다. 민심이 자기편이라고 자신한 후버 대통령은 은행가들과 전면전에 나섰다. 그는 뉴욕증시가 은행가들이 조작하는 도박장이라고 비난하며, 시장을 조작하는 투기자들이 시장의 믿음이 회복되는 것을 막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뉴욕 증권거래소의 휘트니 소장에게 만약 증시 조작 행위를 저지하지 않으면 의회조사를 발동해서 증권시장에 대한 감사를 진행하겠다고 경고했다.

대통령의 요구에 대한 월가의 답변은 간결하면서도 단호헀다. "황당한 거짓말이다.!"

후버 대통령은 즉시 상원의 은행 및 통화위원회에 증시 조작 행위에 대한 조사를 멸령했다. 난감한 월가는 라몬트를 백악관으로 파견해 대통령 및 국무장관과 오찬을 함께하며 조사를 중단하도록 요구했으나, 대통령은 요지부동이었다.

1920년대 말 주가 조작 행위의 배후로 조사를 확대하면서 묻혀 있던 사실들이 끊임없이 폭로되었다. 골드만삭스나 모건 사 등과 관련된 증시 스캔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증시 폭락과 경제대공황의 논리 관계가 대중 앞에 낱낱이 드러나자, 국민의 분노는 마침내 은행가들을 향해 폭발했다. 그러나 후버 대통령과 그의 정치가로서의 미래도 은행가와 국민의 분노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인물이 미국 20세기 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칭송받는 프랭클린 루스밸트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어떤 인물인가?

여러분도 나도 알고 있다시피. 진정한 상황은 거대한 권력의 핵심에 있는 금융 세력이 앤드루 잭슨 대통령 시절부터 정부를 통제했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잭슨 시절처럼 은행과의 투쟁을 되풀이할 것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보다 더 심도 있고 광범위하게 진행된다는 겁니다. 프랭클린 루스밸트,1933년 11월 21일 루스벨트의 이러한 '진실 고백'은 여러 면에서 윌슨과 비슷하다. 윌슨이 학자 출신이라서 은행가의 수법에 어두웠다고 말한다면, 루스벨트의 경력으로 볼 때 그의 발언은 얼마간 가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직 대통령과 월가의 애매한 관계를 공격의 돌파구로 삼는 것은 역대 대통령 후버들이 대선에서 자주 사용하고 효과도 만점인 수법이었다. 1932년 8월20일, 루스벨트는 오하이오 주의 경선 연설에서 열변을 토했다.

우리는 미국 공업의 3분의 2를 100개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이들 회사는 다섯명의 손에 의해 통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30개 은행과 상업은행의 증권거래업자가 미국 자본의 흐름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 고도로 집중된 경제 권력이 극소수의 손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은 후버 대통령이 말한 개인주의를 완전히 위배하고 있습니다.

루스벨트는 여기서 과거 은행 세력과 사건으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제퍼슨 대통령을 예로 들었다.       자신도 작은 힘으로 거대 금융 세력에 도전하는 용감한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루스벨트가 국제 금융재벌들과 분규를 일으킨 경력은 훨씬 못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