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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가화폐의 '뉴딜정책'

 

케인스는 황금을  '야만적 유산'이라고 표현했다. 케인스가 황금을 죄악시한 동기는 무엇일까? 인플레이션을 극구 반대하던 케인스가 어떻게 해서 황금의 천적으로 변했을까?

앨런 그린스펀은 40세 때까지만 해도 금본위제의 변함없는 옹호론자였다. 그런 그가 연방준비은행 총재에 취임한 후 부터 황금 문제에 대해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2002년까지 여전히 '황금은 모든 화폐의 최종적 지급 수단' 이라고 인정은 했지만, 1990년대 서방 중앙은행 재벌들이 연합해서 황금 가격을 인하한 음모를 '방관' 했다.

국제 금융재벌들과 그들의 '어용' 이론가들은 왜 그토록 황금을 혐오헀을까? 무슨 이유로 케인스의 염가화폐 이론은 그토록 환영을 받았을까?

국제 금융재벌들은 황금이 결코 보통 귀금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 본질적으로 황금은 유일하고, 고도로 민감하며, 역사적으로 계승되는 '정치 금속'이다. 황금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세계적으로 금융위기가 일어난다. 정상적인 사회 상황에서 금본위제도를 폐지하면 틀림없이 심각한 사회불안이 일어나고, 심지어 폭력 혁명을 불러오기도 한다. 국민은 극단적이고 특수한 상황에서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천부적 권리를 잠시 포기하는데, 은행가들이 심각한 위기와 불경기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기와 경기 쇠퇴의 위협 아래 국민은 가장 쉽게 타협하고 단결력이 쉽게 무너지며, 여론도 쉽게 오도할 수 있다. 사회의 주의력은 쉽게 분산되고, 은행가의 권모술수도 

가장 쉽게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위기와 금융의 쇠퇴는 은행가들에게 정부와 국민을 상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되풀이되어 사용되고 있다.

1929년 이래의 심각한 경제위기는 국제 금융재벌들에게 정상 상태에서는 어려운 '금본위제 폐지' 라는 대업을 완수할 절호의 기회였다. 이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향하는 금융의 길을 미리부터 닦아놓았다.

케인스의 '염가화폐'

케인스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갔을 때 이미 인플레이션이 국민과 사회에 미치는 거대한 잠재적 피해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평화의 경제적 결과> 라는 저서에서 인플레이션의 실제를 신랄하게 지적했다. 독일의 1923년 초대형 인플레이션으로 인플레이션의 거대한 살상력은 이미 검증된 상태였다.

40세때 <황금과 경제의 자유>라는 책을 발표한 그린스펀도 케인스와 매우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금본위제가 없는 상황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국민의 재산이 인플레이션에 먹히는 것을 막지 못한다.이는 곧 복지통계학자들이 금을 격렬히 반대하는 이유다. 적자재정은 간단히 말해 재산을 몰수하려는 음모다. 황금은 그들의 음모를 막아서 재산권 보호자 역할을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러한 핵심을 파악한다면 금본위제 를 악의적으로 비방하는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펀의 지적처럼 금본위제는 인플레이션의 범람을 단단히 억제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케인스와 그린스펀은 모두 금본위제의 옹호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해서 훗날 금을 '야만적 유산'이라고 비하하고, 황금의 화폐 지위를 아예 무시해버릴 수 있었을까?

그린스펀이 처한 환경을 통해 그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JP 모건의 품에 뛰어들어 JP모건 사와 다른 월가 은행의 이사에 임명되는 순간, 금융의 세상에는 그곳만의 규칙이 있다는 진리를 명백히 깨달았다.

전 세계의 눈길이 자신의 깊은 주름에 집중되는 순간, 그린스펀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를 배후에 둔 조조가 된 느낌이었다. 연방준비은행 뉴욕은행이 진정한 정책 결정자였던 것이다. 2002년 의회 청문회에서 텍사스 주의원 론 폴 이 질문하자, 그린스펀은 비로소 자신이 1966년 당시의 관점을 뒤집은 적이 없노라고 대답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황금은 모든 화폐 가운데 '최종 지급 수단'이며, 미연방준비은행은 금본위제도를 '모방'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케인스의 상황은 그린스펀과 좀 다르다.

미국의 유명한 학자 머리 로스바드는 케인스의 인격적 특징을 심오하게 묘사했다. 그는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와 엘리트 의식으로 사회도덕을 멸시하는 영국의 분위기가 케인스의 사상 체계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한다.

특히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비밀조직 '사도회'가 케인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했다. 구미 대학에서 이런 비밀조직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 대학 동창회나 문학 동아리 등의 가벼운 모임과는 성격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종교적 사명을 짊어진 엘리트의 핵심으로, 100년의 역사를 가진 조직도 있다. 뿐만 아니라 평생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방 사회의 통치 계급 중에서도 매우 견고한 배타적 이익집단이다.

케임브리지의 사도회는 트리니티칼리지와 킹스칼리지의 가장 우수한 12명으로 구성된다. 하나같이 머리가 비상할 뿐 아니라 내노라하는 집안의 자제로 장차 영국 통치 계급의 일원이 될 상류 계층이다. 그들은 매주 토요일 비밀 장소에서 모임을 갖고 철학이나 미학에서부터 정치 및 상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중심으로 토론했다. 그들은 자신의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사회의 보편적 도덕을 멸시했다. 그들은 인류의 가장 지혜로운 자로 자처하며 스스로를 천부적인 세계의 통치자라고 여겼을 뿐 아니라, 이 같은 신념을 서로가 반복해서 불어넣어주었다. 케인스는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이러한 도덕적 우월감이 심한 것은 아니겠지? 나는 이 세상 절대다수의 사람은 어떤 사물의 본질도 보지 못한다는 느낌이 드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 우둔하거나, 아니면 너무 사악하기 때문이지."

그들 모임에는 케인스와 유명한 철학자 러셀 같은 학자형 엘리트 외에도 로스차일드 남작 등의 금융계 거물이 포함 되어 있었다. 케임브리지를 떠난 후에도 매주 토요일 여전히 사도회에 참석하는 성인 사도를 '천사'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새론운 사도의 선발을 비롯한 여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헀다.

케인스보다 몇 살 아래인 빅터 로스차일드는 대영제국의 화폐 발행권을 장악한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손자이며, 남작칭호를 받은 3대 후계자였다. 빅터와 케인스는 미국 외교협회 와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적극적인 제창자였다. 이들 두 조직은 구미판 중앙당교라고 할 만큼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구미 통치 집단의 간부들을 배출해왔다. 빅터는 가문의 관례에 따라 미국 JP모건은행에서 한동안 일하면서 월가를 익혔으며, 네덜란드 회사 쉘의 석유 이사도 맡았다. 영국 정보부처의 고위 관리를 지낸 그는 훗날 영국 대처 총리의 안전 고문을 맡았다. 빅터와 자주 만나는 동안 머리 회전이 빠른 케인스는 염가화폐와 인플레이션 이론이 당시 국제 금융재벌이 추구하는 방향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케인스는 자신에 대한 정치적 소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어차피 일반인이 생각하는 도덕규범의 구속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것짓 데이터를 동원해 자신의 경제 이념을 뒷받침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지적이 이를 뒷받침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지적이 이를 뒷받침한다. "케인스는 원칙이란 자신이 정확할 때 권력을 얻는 기회를 방해할 뿐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그는 언제라도 이전의 신앙을 바꿀 수 있다. 특정한 상황에서라면 설사 단 한 푼의 동전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한 경제학자가 자신의 학설을 내세우려면 금융계 및 정계 거물들의 후광이 필요하다는 점도 케인스는 잘 알고 있었다.    "역사 발전의 정확한 방향"을 파악한 케인스는 즉시 자신의 진정한 재능인 달변과 뛰어난 마케팅 능력을 발휘했다.

애덤 스미스,데이비드 리카도 ,알프레드 마셜을 배출한 케임브리지는 자연스럽게 세계경제 이론의 발원지로 인정받았다.마셜이 직접 지명한 후계잔인 케인스는 더욱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의 저서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 1936년 출판되자, 금융재벌들은 자신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경제학 이론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반면 정치가들은 '돈을 빌리고,찍어내고, 쓰는 '염가의 화폐 정책에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찬사와 비판의 목소리가 학계를 뒤덮었다.

케인스는 자신의 염가화폐 이론이 국제 금융재벌들과 정치가들의 전폭적 지지를 언으리라고 확신했다. 이로 말미암아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일반 대중의 반응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너무 우둔하거나, 아니면 너무 사악하기'때문이다. 남은 건 학술계의 반응이었다.

케인스는 먼저 자신을 대표로 한 현대 경제 이론과 전통 경제 이론이라는 양대 진영의 대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신경제 "성전"은 너무 어려워서 30세 이하의 젊은 경제학도들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젊은 경제학도들의 호감을 불러왔다. 폴 새뮤얼슨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다행히도 아직 30세가 안 되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젊음이란 정말 좋은 것이로군."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런 새뮤얼슨 자신도 케인스의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 '너무 엉망이고 구성이 혼란스러우며 모호하게 쓴 책'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미국의 학자들은 이 책이 미국 중서부의 변두리 대학교수가 썼다면 발표하기도 어려웠을 테고, 역사적으로 길이 남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