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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공황의 진짜 의도

1929년에 일어난 주가 폭락이 1927년 비밀회의에서 결정된 일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뉴욕의 금리가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됨에 따라 런던의 금리는 의식적으로 인상되었으며, 뉴욕과 런던 간 차이로 미국의 황금이 영국으로 흘러 들어가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부활하는 데 일조했다.

사실 유럽의 금융가들은 통화 팽창을 이용한 재산 수탈의 효율이 대출로 거둬들이는 이자 수익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황금은 화폐를 방출하는 기초가 되며, 지폐는 자유롭게 황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은행가들이 이용하는 통화 이완 정책이라는 고효율 무기의 효과를 크게 제약했다. 당시 영국 은행가를 비롯한 유럽 금융계가 왜 금본위제를 부활라려고 했는지 이해가 잘 안된다.

사실 국제 금융재벌들은 다음 단계의 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배로 끝이 났지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독일 로스차일드 가문과 와버그 가문의 은행이 부담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국난을 이용해 큰돈을 챙기려는 계획을 세웠다. 첫 번째 행동은 독일 은행가들이 통화 팽창 정책이라는 쉬운 방법을 이용해 독일 군민의 저축금을 신속하게 뺴내오는 것이다. 이때 인류는 슈퍼인플레이션의 위력을 처음 절감하게 된다.

1913 ~ 1918년의 전쟁 기간에 독일의 화폐 발행량은 8.5배나 증가했으며, 마르크화의 가치는 달러에 비해 겨우 50% 인하되는 데 그쳤다. 독일 중앙은행은 1921년부터 화산이 폭발하는 기세로 시중에 통화를 풀기 시작했다. 1921년은 1918년에 비해 다섯 배가 늘었으며, 1922년은 1921년보다 열 배가, 1923년은 1922년보다 7,253만 배가 증가 했다. 1923년 8월부터 물가는 천문학적 숫자로 양등해 빵 한 조각이나 우표 한 장 가격이 무려 1,000억 마르크까지 치솟았다. 독일 노동자의 하루 일당은 반드시 두 차례에 나누어 지급되었으며, 돈을 가져다 한 시간 내에 다 써버려야 했다.

독일 은행가들이 중산층의 저축을 모조리 빼가자, 중산층은 하루아침에 극빈자로 전락했다. 이러한 구도는 나중에 나치즘이 등장하는 군중의 기초를 다져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인들의 마음속에 유대계 은행가에 대한 극심한 증오의 씨앗을 깊이 심어놓았다. 1870년 독일과 프랑스 간의 전쟁에 패배한 프랑스가 겪은 어려움보다 지금 독일 국민이 겪는 고통이 훨씬 컸다. 더 참혹한 세계대전을 촉발할 모든 요소는 1923년 이미 갖춰진 셈이다. 은행가들이 독일인의 재산을 웬만큼 휩쓸어가자 마르크화는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국제 금융재벌들의 조정으로 미국인의 황금이 독일 화폐를 안정시킬 구명대 역할을 했다.

두 번쨰 단계는 영국 은행가들이 직접 나설 차례였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잠수함이 대서양에 번번히 출몰해 습격하는 바람에 영국에서 황금을 운반하는 배가 출항을 할 수 없었다. 잉글랜드은행은 하는 수 없이 황금의 현금화를 잠시 중지한다고 선언헀으며, 이때부터 파운드의 금본위제도는 유명무실해졌다.

1924년, 훗날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원스턴 처칠이 영국 재무장관에 임명되었다. 금융 업무에는 전혀 문외한이던 처칠은 런던 은행가들이 부추기는 가운데 금본위제의 부활을 준비했다. 세계 금융 분야에서 파운드화의 권위를 지킨다는 명목이였다. 1925년 5월13일, 영국은 '금본위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영국의 국력은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많이 약화되어 경제력도 신흥국가인 미국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며, 심지어 유럽에서조차 그 위치가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금본위제를 부활하면 파운드화의 강세를 초래해 날로 경쟁력을 잃어가는 영국의 수출 무역이 심각한 타격을 입고, 국내 물가의 하락과 임금 삭감이나 실업률 상승 등의 경제위기가 닥쳐올 것이 확실했다.

이때 경제학의 대가인 존 케인스가 혜성같이 등장했다. 케인스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영국 재무부 대표를 맡았었다. 그는 독일에 대한 심한 조치를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심지어 사직을 감수하면서까지 항의헀던 인물이다. 그는 금본위제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으므로 런던 은행가 세력과는 물과 불의 관계였다. 금본위제의 타당성을 조사한 맥밀런위원회에서 케인스는 격앙된 어조로 금본위제도의 폐단을 강조했다. 그는 황금이란 '야만적 유산'에 불과하며, 경제발전의 제약일 뿐이라고 말헀다. 이에 맞서 잉글랜드은행의 노먼 역시 금본위제도가 성실한 은행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제도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부담이 아무리 커도, 아무리 많은 업종이 타격을 받아도 런던 은행가들에 대한 국민의 이미지는 아직 좋은 상태였다. 따라서 은행가들이 지지하는 것은 무조건 좋고, 은행가 관점에 대한 맹렬한 비판은 국민을 향한 비난과 같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이 계획의 절묘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