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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1929년, 거품이 빠지다_화폐전쟁

연방준비은행은 1929~1933년 통화 유통량의 3분의1을 감축했으며. 그 결과 경제대광황을 몰고 왔다._밀턴 프리드먼

비밀회의가 끝난 후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즉시 행동을 개시해 금리를 3.5%로 인하했다. 1928년 한 해에만 600억 달러의 통화를 회원 은행에 방출했다. 회원 은행들은 15일 기한의 당행 수표를 담보로 삼았다. 이 돈을 금으로 환산하면, 당시 세계 황금 유통향 총액의 여섯 배나 되는 양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방출한 달러는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공개시장에서 달러로 어음을 사들여 방출한 통화량보다 33배나 많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1929년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회원 은행에 580억 달러의 통화를 방출했다는 것이다.

당시 뉴욕 증권시장은 거래업체에 1%의 자금으로 주식을 사도록 허가하고, 나머지 돈은 거래소의 은행에서 대출해 주도록 되어 있었다. 거액의 신용대출금을 쥐고 상대를 못 찾아 조바심하던 은행과 돈에 목말라하던 증권업자의 만남은 그야말로 환상의 궁합이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에서 5%의 금리로 돈을 빌린 은행들은 12%의 금리로 증권업체에 대출을 해주면서 7%라는 차액을 챙겼으니,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장사였다. 이런 상황에서 뉴욕 증시가 폭등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이때의 미국은 남북과 동서를 막론하고 저축금을 동원해 증권 '투자'에 몰두하라며 온 국민을 부추기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워싱턴의 정치가들마저 월가의 선전 도구가 되어 국민을 선동했다. 재무장관 앤드루 멜런은 정식 담화를 통해 국민에게 뉴욕 주가가 높은 편이 아니라고 보장했으며,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은행가들이 써준 원고로 전국에 담화를 발표하면서 주식 구매가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1928년 3월, 증권업자에 대한 대출이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는 상원의 질문에 연방준비은행의 이사는 이렇게 답변했다.   "증권업자에 대한 대출이 지나치게 많은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들 증권업자의 성향이 안전을 지향하고 보수적이라는 점은 확신합니다."

1929년 2월6일, 잉글랜드은행의 노먼이 다시 미국에 도착했다. 곧이어 연방준비은행은 1927년 이래의 통화 팽창정책을 시작했다. 영국 은행가들은 대사를 치를 준비를 끝낸 듯했다. 이제 미국 쪽에서 손을 쓸 시기가 온 것이다.

1929년 3월, 미국 금융의 아버지 폴 와버그가 국제청산은행의 주주 연례회의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절제를 모르고 계속 욕심을 키워갈 경우 최종결과는 투기하는 당사자뿐 아니라 전국을 위기로 몰고 갈 것이다."
3년에 걸친 "절제 없는 탐욕"에 몇 달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폴이 갑자기 나서서 경고했고,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과 사회적 위치의 그가 한 말이 <뉴욕 타임스>에 보도되자마자 시장은 불안에 휩싸였다. 증시의 사형 판결은 1929년 4월20일에 일어났다. 이날 <뉴욕타임스> 1면 기사는 중요한 소식을 보도하고 있었다.

워싱턴에서의 연방자문위원회 비밀회의

연방자문위원회는 이미 미연방준비은행이사회에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여전히 비밀에 부쳐져있다.연방자문위원회와 연방준비은행이사회의 다음 동향은 여전히 비밀스러운 분위기에 가려 있다. 이 수상한 회의의 비밀조치는 매우 엄격하다. 기자는 모호한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연방준비은행은 1929년 8월9일 금리를 6%로 올렸으며, 그 뒤를 이어 연방준비은행 뉴욕은행이 증권거래업자에 대한 금리를 5%에서 20%로 인상했다. 이 조치로 투기업자들은 지금의 함정에 빠졌다. 무조건 증시에서 빠져나오는 것 말고는 다른 탈출구가 없었다. 증권시장의 상황은 급전직하로 치달았다. 마치 강둑이 터진 듯 투매 전표가 10월과 11월 두 달 동안 전체 증권시장을 휩쓸었다. 1600억 달러의 재산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1600억 달러 라면 어느 정도일까?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기간에 생산한 모든 물자를 합친 금액에 육박하는 숫자다.

그해 월가의 한 증권업자는 이렇게 묘사헀다. "치밀한 계획을 통해 뉴욕 통화시장에서 증권에 투자할 대출 공급이 급감함으로써 발생한 1929년 경제위기는 사실 국제 금융재벌들이 대중을 상대로 치밀하게 계획한 양털 깎기 행동이었다."

1930년 7월 4일 자 <뉴욕 타임스>는 상처투성이 미국 경제를 두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원자재 상품 가격은 1913년 수준으로 급락했다. 노동력 과잉으로 임금은 삭감되고, 총400만 명의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모건은 뉴욕 연방준비은행과 워싱턴의 약해빠진 연방준비이사회를 조정해 전체 연방준비은행의 시스템을 통제했다."

월가는 금융위기를 통해 자기들에게 필요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1930 ~ 1933년 총 8,812개의 은행이 도산했는데,       대부분 뉴욕 5대 은행에 반기를 들고 미연방준비은행 시스템에 동참하지 않은 은행들이 속속 종말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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