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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전쟁 양털깎기 배경

미국 방위산업 복합체의 선구자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는 빈틈없는 인물로, 세세한 부분에 집착했다. 그는 일찍이 시카고에서 곡물 투기로 큰돈을 벌었고, 전시에는 모건의 눈에 띄어 수출관리부에서 일하면서 군수물자의 구매를 담당했다.

스테티니우스는 전쟁 기간 동안 세계 최대의 소비자였다. 매일같이 1,000만 달러에 달하는 군수물자를 사들였으며, 이물자들을 선적하고 보험에 든 다음 유럽으로 운반했다. 그는 생산과 운송 효율을 최대로 향상시켰다. 스테티니우스가 월가 23번지의 본부에서 한마디의 명령만 내리면 무수한 군사 부품 대리상과 생산업자가 그의 사무실로 몰려들었다. 그는 문마다 경비를 세웠다. 군수물자의 매월 구매량은 20년 전의 전 세계 국민총생산 합계와 맞먹었다. 독인은 미국이 이토록 짧은 시간안에 군사공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으리라고 상상조차 못했다.

모건의 심복 데이비슨

데이비슨은 모건 제국을 세우는 데 견마지로를 다한 인물이다. 그는 JP모건 사장 시절 미국 적십자회라는 '고깃덩어리'를 손에 넣어 미국인들이 헌금한 3억7,000만 달러를 주물렀다.

베르사유조약_20년 기한의 휴전협정

1918년 11월11일, 피비린내로 얼룩진 제1차 세계대전이 마침내 끝났다. 독일은 패전국이 되어 13%의 영토를 잃고,320억 달러의 전쟁 보상금을 내놓아야 했다. 여기에는 매년 5억 달러의 이자가 붙었다. 그 밖에도 수출 제품에 26%의 추가 비용을 내고,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었다. 독일 육군은 10만명 이상을 보유할 수 없으며, 해군 주력 전함도 여섯척을 넘으면 안되고, 잠수함 비행기 탱크 중화기 등의 공격성 무기를 보유할 수 없었다.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는 "독일인의 지갑을 뒤져 돈을 찾아낼 것이다"라고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사석에서는 이렇게 인정했다. "우리가 초안한 문건인 베르사유조약은 20년 후 전쟁이라는 후환을 남길 것이다. 이런 조건을 독일 국민에게 강요한다면, 독일인으로 하여금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책동하게 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영국 외무장관커즌 경도 같은 견해를 밝혔다. "이 조약은 평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20년 기한의 휴전 문서에 불과하다." 이협의서를 본 미국의 윌슨 대통련은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독일인이라면 이 협의서에 절대로 서명하지 않을걸세."

문제는 정치가들이 문제의 본질을 인식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들 배후의 '고문들'이 진정한 정책 결정자라는 점이었다. 윌슨을 대동해 파리에 도착한 은행재벌 중에는 수석 금융 고문 폴 와버그, 모건과 그의 변호사 프랭크, 모건 사의 토머스 라몬트 사장, 전시산업회 바루크 의장과 덜레스형제(훗날 한사람은 CIA의 수장에 오르고,다른 사람은 아이젠하워 시절 국무장관을 역임함), 영국 총리 배후의 피립 서순 경이 있었다. 서순 경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직계자손이다. 프랑스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의 고급 참모 조르주 망델도 있었는데, 그의 본명은 여로보암 로스차일드다. 독일 대표단의 수석대표는 다름 아닌 폴의 큰형 맥스 와버그였다. 국제 금융재벌들이 파리에 운집하는 동안 훗날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불린 에드먼드 로스차일드 남작이 주최자로 나서 성대하게 접대했다. 그는 미국 대표단의 요인들을 파리에 있는 자신의 호화로운 장원에 머물도록 했다.

파리강화회의는 사실 국제 금융재벌들의 잔치였다. 전쟁으로 횡재한 그들은 언제라도 다음 전쟁인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킬 불씨를 갖고 있었다.

'양털 깍기'와 1921년 미국 농업의 불경기

1984년 9월1일, 우리는 모든 대출의 연장을 중단할 것이다. 그날 우리의 돈을 회수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상환하지 않은 재산을 소유하고 경매에 부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정한 가격으로 미시시피 강 서쪽 3분의 2에 달하는 농토와 동쪽의 거대한 토지를 얻을 것이다.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고용인이 될 것이다. 영국처럼 말이다.

_1891년 미국 은행가협회, 1913년 4월 29일 의회 기록에서

양털 깎기는 은행가들 사이에 통하는 전문 용어로, 경제가 번영과 쇠퇴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기회를 창출해 정상 가격의 몇 분의 1밖에 안 되는 가격으로 타인의 재산을 가로채는 행위를 말한다. 미국의 화폐 발행권을 통제하게 된 은행가들은 경제의 번영과 쇠퇴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의 양털 깎기 행위는 은행가에게 마치 사냥으로 생활하는 유목의 단계에서 과학적으로 사육하는 고도의 안정적 생산 단계로 진화한 것과 같았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에 보편적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대규모의 전쟁 물자 구매는 각 업종의 생산과 서비스를 촉진했다. 미연방준비은행은 1914~1920년 경제 분야에 막대한 물량의 화폐를 투입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금리는 1914년6%에서 1916년 3%까지 내려간 후,1920년까지 지속되었다.

은행가들은 유럽의 협상국에 대출을 제공하기 위해 1917~1918년 네 차례에 걸쳐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사고 팔 수있는 '자유공채'를 발행했다. 이자는 3.5%부터4.5%까지 다양했다. 이 채권을 발행하는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미연방준비은행이 과다하게 발행한 화폐와 신용대출을 흡수하는 데 있었다.

전시에 노동자들은 높은 임금을 받고, 농민들의 양식은 전쟁 통에 높은 가격으로 팔린다. 노동자 계층의 경제 상황은 크게 좋아지고, 전쟁이 끝날 무렵 생활비를 절약한 농민들의 손에는 대량의 현금이 남아 있다. 이 거액의 재산이 월가 은행가들의 손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중서부의 농민들은 보수적인 현지 은행에 저축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현지의 중소 은행가들은 뉴욕의 국제 금융재벌들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연방준비은행 시스템에 동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럽 전쟁을 위한 대출도 지원하지 않았다. 월가의 큰손들은 기회를 봐서 이 촌뜨기들을 단단히 손봐줄 생각이었다. 게다가 농민들의 주머니에는 돈이 두둑했다. 오래전부터 이 돈을 노리던 월가의 금융재벌들은 드디어 양털 깎기에 나섰다.

그들은 먼저 '유인작전'으로 '연방농업대출위원회'라는 기구를 설립해서 농민들의 피땀 어린 돈을 새로운 토지 구매에 사용하도록 '격려'했다. 농민들은 장기 대출을 해주는 이 조직에서 돈을 얻고자 안달이었다. 많은 농민이 이 조직의 도움을 받아 국제 금융재벌에게 장기 대출을 신청했으며, 고액의 선납금을 지불했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치밀하게 설계된 함정에 빠진 사실을 영원히 모르고 지날 수도 있다.

1920년 4~7월의 넉 달 동안 공업과 상업무역 분야에는 신용대출로 거액이 쏟아져 들어옴으로써 앞으로 닥칠 신용대출 긴축에 대비했다. 그러나 유독 농민의 신용대출 신청만 모두 거절당했다. 이것이 바로 월가가 치밀하게 설계한 금융 제한 위기였다. 그 목적은 농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연방 준비은행에 복종하지 않는 농촌 지역의 중소은행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상원의 은행 및 통화위원회 오언 위원장이 1939년 상원에서 열린 백은 공청회에서 말했다. "1920년 초에 농민들은 매우 부유했다. 그들은 장기 대출금 상환에 박차를 가했으며, 대출을 얻어 새 땅을 사들였다. 그러나 1920년 하반기에 갑자기 들이닥친 신용대출과 통화의 긴축으로 그들은 대규모 파산 사태를 맞았다. 1920년에 발생한 농민 파산은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에 따른 과다한 신용대출은 몇 년만 지나면 해결되기 마련이다.그러나 연방준비은행이사회는 1920년 5월8일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온종일 모의를 거듭했으며, 회의 기록은 60쪽에 다랬다. 밀실에서 탄생한 기록은  1923년2월19일 상원의 문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연방준비은행의 A군 이사와 연방자문위원회의 구성원들이 회의에 참가했다. 그러나 B군 이사와 상업, 무역,농업을 대표하는 이사들은 회의에 초청되지 않았다. 미국국민을 대표하는 C군 이사들 역시 초대를 받지 못했다.

재벌 은행가들만 참가한 이 비밀회의에서 신용대출 긴축을 직접 조작했다. 그 결과 이듬해 국민소득이 150억 달러감소하고, 수백만의 실업자가 양산되었으며, 토지와 농장 가치는 200억 달러나 폭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