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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횡재한 은행가들 화폐전쟁2편

미국이 1917년4월6일 전쟁에 개입한 이후 월슨은 국가의 주요 권력을 자신의 경선 때 큰 역할을 한 세 사람에게 부여했다. 폴 와버그가 미국 은행 시스템을 장악하고,버나드 바루크가 전시산업회 의장을 맡았으며, 유진 메이어가 전시금융회사를 통제했다.

 

와버그형제

폴의 큰형 맥스 와버그는 독일 정보부처의 수장이었다.그런데 폴은 미국 최고의 금융 결정권자이자 미연방준비은행의 부총재였다. 셋째 펠릭스는 쿤롭 사의 사장이었으며, 함부르크 금속거래소장인 넷째 프리츠는 독일과 러시아의 비밀 강화 때 독일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이들 네 형제는 모두 유대계 은행가 가문의 지도자급 인물이었다.

미 해군의 비밀 보고서는 1918년 12월 12일 폴 형제에 관한 정보를 이렇게 적고 있다. "폴 와버그 : 뉴욕,독일 이민자로 1911년 귀화하여 미국 시민이 됨. 1912년 독일 황제로부터 포상을 받음. 미연방준비은행 부총재 역임. 독일 정보부처의 수장을 지낸 형제가 있음." 또 다른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탁자를 치면서 맥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대가 언제나 정확하단 말인가?' 그러나 그 후에도 금융에 대한 맥스의 의견을 계속 경청했다고 한다."

폴은 1918년 5월 연방준비은행의 직챙에서 물러났는데, 이상하게도 보고서에서는 거론되지 않았다. 미국이 참전한 이후 폴은 형이 독일 정보부의 수장이라는 이유로 이론상 적과 통한다는 죄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미국 금융을 움켜쥐고 있는 폴을 과연 누가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 1918년 6월, 폴이 연방준비은행 부총재 직을 사직하면서 윌슨에게 메모를 보냈다. "내게는 독일 은행에서 일하는 두 형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연히 자기의 조국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하고 있습니다. 마치 내가 내 나라를 돕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전시 미국 공업의 황제 버나드 바루크

투기로 집안을 일으킨 바루크는 1986년 미국의 주요 연초회사 6개를 합병해 연합연초회사를 설립했으며, 그 후 구겐하임 가를 도와 동광공업을 합병했다. 또한 쉬프 휘하의 해리먼과 손을 잡고 뉴욕의 운송 시스템을 통제하기도 했다.

1901년, 바루크는 형제들과 바루크브라더스를 창립헀다.

윌슨 대통령이 1917년에 바루크를 미국 전시산업회 의장에 임명하면서, 그는 미국에 있는 모든 공업기업의 생사를 한 손에 쥐게 된다. 바루크는 매년 100억 달러에 달하는 구매를 담당해 거의 혼자서 미국 정부의 전쟁 물자 구매 가격을 결정했다. 1935년에 열린 의회 청문회에서 바루크는 이렇게 말했다. "윌슨 대통령이 내게 편지 한 통을 주면서 모든 공장과 공업기업을 관리하라고 했다. 나는 미국 철강회사의 저지 게리(Judge Gary)총재와 불쾌한 일이 있었는데, 그 편지를 보여주자 그는 '보아하니, 내가 우리 사이의 불쾌한 감정을 해결해야 할 것 같군.' 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다."

어떤 의원은 바루크가 미국 공업의 생사여탈권을 쥘 만한 자격이 있 는지 의문을 표시했다. 그가 공업전무가도 아니고 공장에서 단 하루도 일해본 적이 없다는 이유였다. 바루크 자신도 의회 청문회에서 자신의 직업이 '투기업자'라고 밝힐 정도였다. 잡지 <뉴요커>는 바루크가 워싱턴에 거짓 평화 소식이 떠돈다는 소문을 듣고 하루에 75만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보도했다.

유진 메이어의 전시금융회사

유진 메이어의 부친은 유명한 국제은행 라자드 프레레의 사장이었고, 유진은 공직에 대한 열정이 각별했다. 그는 바루크와 함께 알래스카의 금광회사를 차린 적이 있으며, 두 사람이 함께 다른 금융 사건을 공모하기도 하는 등 서로 가깝게 지냈다. 전시금융회사의 중요한 임무는 미국 국채를 팔아서 전시의 금융 지원을 해주는 일이다.

유진이 경여하는 전시금융회사의 분식회계 행위는 그 수법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훗날 의회에서 이 회사를 조사할 당시, 밤마다 장부를 조작하고 이튿날 의회 조사원들에게 보여줄 정도로 치밀했다. 맥패든 하원의원이 이 회사를 상대로 1925년과1930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한 조사에서 문제투성이의 회계 과목이 발견되었다. 채권 중복 기재2,314건,어음 할인 중복 기재 4,698건으로 액면가는 50달러부터 1만 달러까지 다양했다.만기일은 1924년78월까지였다. 물론 일부 과목은 착오에서 비롯된 문제였지만, 대부분 분식회계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유진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면, 제1차 세계대전 후 연합화학과 염료회사를 인수합병하고<워싱턴 포스트>까지 사들일 수 있었겠는가?!

유진은 분식회계로 최소한 수억 달러의 국채 차액을 챙겼을 것으로 추정된다.